아까 '누구'가 몇 인칭인지 질문한 학생에 대해서 생각을 좀 더 해봤습니다. 글이 길어질 것 같으니까 여유 나실 때 천천히 읽어 주세요 ㅎㅎ
1. 이관규 책과 학교문법과 문법교육을 찾아봤는데 여기에서는 '누구'를 1,2,3인칭으로 나누지 않고 있네요. 그냥 인칭 대명사를 1,2,3인칭 대명사와 미지칭 부정칭 재귀 대명사로 해서 총 6개로 분류했어요. '누구'의 경우에는 맥락에 따라 부정칭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이 추가로 있고요.
그 이상의 논의는 저는 접해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깊이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저도 별 생각없이 이 도식으로 수업을 했습니다.
2. 아까 선생님께 '누구'라는 대명사에 대해서 질문한 학생은 기본적으로 호기심과 탐구 능력이 있는 학생일 것 같습니다.
아마 선생님도 마찬가지이시겠지만, 저는 이런 질문을 만나면 대답을 바로 해주지는 않더라도 일단 칭찬을 많이 해줍니다. 수업에서 배운 내용에서 허점을 찾고 의문을 제기하는 건 아주 적극적인 지적 활동이니까요.
3. 다만 아이들이 굳이 파고 들 필요가 없는 문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문법을 가르칠 때 '개념'과 '분류'를 가장 중요하게 다룹니다. 좀더 구체화하자면 1)개념 2)분류의 취지, 3) 분류의 기준을 중시하고 그 다음이 4)분류의 내용입니다. 언어 생활에서 나타는 규칙을 파악하고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이 문법이라고 할 때, 그 취지에 맞는 사고 틀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어떤 말들은 그 분류의 경계에서 오락가락하지요. 의존 명사였다가 조사였다가 오락가락하는 '뿐' 같은 단어들 말입니다. 그 애매한 경계를 확정하고 경계의 근거를 고민하는 작업은 국어학적으로 흥미진진할지언정 고등학생이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학습 목표는 아직 문법 연구의 큰 틀을 알고 그 취지와 의미를 익히는 거니까요.
그래서 수업시간에도 애매한 부분이 나오면 '굳이 알 필요 없다'고 얘기를 해주곤 해요. 아이들은 그게 '수험에 필요 없다'의 다른 표현이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요. 그게 다른 뜻임을 선생님은 아시겠죠 ㅎㅎ
4. 하지만 또 동시에, 학교 문법이라는 게 사실은 엉성한 약속이고 구멍이 많은 개념의 집합이잖아요. 아이들에게도 문법이 만고불변의 불가역적인 틀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든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서 수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현행 학교 문법의 큰 틀을 가르친 다음에, 헷갈리고 어려운 부분은 심화학습으로 따로 돌려 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번에 '시간'이라는 명사가 의존명사로 쓰인 예문이 있었는데요.(제가 실수로 넣었어요!) '이건 까다로운 문제니까 기본 틀을 다 익힌 다음에 고민하자'라고 적당히 넘겼어요. 나중에 품사를 아이들이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이런 부분은 심화학습 시간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의존 명사이자 자립 명사인 단어들, 또는 의존명사이거나 조사인 단어들!)
5. 다만 선생님은 3학년 수업을 하시니까 진도 압박이 있으시겠죠. 저는 1학년이라 그 부분에서는 마음이 편하네요. (하지만 정말로, 서둘러 진도를 나가는 게 3학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요? 이 얘기는 또 다음 기회에ㅎㅎㅎ)
6. 기본 내용 학습과 심화학습을 나누는 것이 아이들을 더 괴롭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한방에 깔끔하게 정리해서 헷갈리는 부분까지 콕콕 짚어서 정답을 알려주는 게 아이들한테는 더 쉽게 느껴질테니까요.
7.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익혀야 할 영역과 굳이 고민할 필요 없는 영역을 제가 섣불리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고민됩니다.
그래서, 좀 열의가 있는 아이들이 까다로운 질문을 해 오면, 근거를 좀더 고민해 보고 깊이 공부를 해보라고 권하긴 하는데요. 실제로 그렇게 하는 아이를 10년동안 한번도 못 만난 걸 보면 제가 선택한 지도 방식이 실제로는 별 효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ㅎㅎㅎ
여러 선생님들이 함께 문법 수업 진도를 나가면서 디테일하게 논의를 하면 좀 정리가 될 것 같은데 혼자서는 고민이 깊어지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8. 저는 임고 준비를 안 해 봤고 사실 대학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 교사가 된 이후에 오히려 급하게 공부해서 배운 게 더 많지 않나 싶을 정도입니다 ㅎㅎ 가까운 친구 중에 교직에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요. 그래서 경력에 비해서 고민이 얕고 지식도 짧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국어과는 선생님들끼리 수업이나 교과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잖아요.
그러던 중에 선생님이랑 우연히 한 교무실에 지내게 되어, 이렇게 오가다 정보도 주고받고 고민도 나눌 수 있어서 참 좋네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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